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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입문자, 페미니즘 입문자의 입장에서 쓴 리뷰입니다.


 


A.

(이미 유명한 작가지만) 만약에 이 소설을 읽을 당신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면, 작가에 대한 정보는 찾아보지 않고 소설만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책날개에 사진이 있으니까 절대 보면 안돼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소설과 편지만 공개한 작가를 추측하던, 60~70년대의 독자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일 것 같아서입니다. 다만 작가가 흘린 몇가지 경험담(공군 조종사, CIA 정보원 등)으로, 사람들은 작가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말해도 되겠네요. 


두 번째 이유는, 익명으로 활동하게 된 배경과 그를 둘러싼 주변의 평가들도 하나의 의미있는 에피소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재미있는 후일담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작품관을 확장시키는 부교재랄까요.



B. 

저는 과학에 문외한이라 SF 소설을 항상 힘겹게 읽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F에는, 이따금씩 도전하게 만드는 분명한 매력이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아닌, 거대한 시간과 우주가 느낄법한 인간의 초라함 같은 거요. 우리가 곤충이나 미생물을 바라보는 것 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하찮고 해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상상(과학계에서는 논문 주제가 될 법한)은 충격 비슷한 쾌감을 줍니다. 


제가 읽은 SF 중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는 소설집이었습니다. 몇 편을 읽다보면 작가가 결말의 펀치라인을 가장 먼저 쓰고 나머지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식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그만큼 마지막에 드러나는 결말이 명쾌하고,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들입니다. 어쩔 땐 그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요. 



C. 

그냥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라 몇몇 작품은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습니다. 7편의 수록작 중 저는 앞의 네 작품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첫 번째 단편 [체체파리의 비법]에서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는 재앙은, 젠더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왜 남자주인공은 곤충을 연구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던 저는 마지막 몇 문단에서 이 모든게 깔끔하게 묶인,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결말에 얼얼함을 맛봤습니다.


[체체파리의 비법]은 외부 요인에 의해, 두번 째 단편 [접속된 소녀]는 내부 요인으로 스러지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성혐오Misogyny는 이 가여운 짐승들에게 효과 좋은 촉진제가 되어주고요.


세 번째 단편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외계와의 조우를 다루는 정통 SF입니다. 동시에 원제 'The women men don't see'가 '남자들이 보려 하지 않는 여자들'로 읽힐 만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의하고 선택하는 여성의 서사입니다. 어쩌면 페미니스트들에겐 놀랍지 않은 이야기겠어요. 저같은 미소지니스트에겐 예측 불가능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는데, 더 심한 미소지니스트들에겐 어쩌면 제목처럼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싶고요.



F. 

귀중한 문명과 지식과 편안함을 만들고 여자와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주장)해온 남자들에게, 1976년에 발표된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의 레이디 블루가 하는 말은 2016년의 대한민국 사회에 페미니스트들이 건네는 말과 일부 비슷합니다.


"물론 우린 당신들의 발명품을 향유하고, 당신들이 맡았던 진화적 역할에 고마워해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내가 이해하는 한, 당신들은 대부분 다른 남성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했지요. 그렇지 않나요?"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여자도 사람'이라는 명제를 이해 못하는 인류는 과연 [체체파리의 비법]에서처럼 재앙을 겪게 될까요? 아니면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서처럼 더욱 '인간적인' 인류로 리셋될까요? 제가 좀 공격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이런 SF의 상상력이 너무 반가운데,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아직 그 정도로 과격하진 않은 것 같아요.


http://aladin.kr/p/gJ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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